모르는 사람이 골라놓은 음악을 따라 듣는 사람, 공포영화라면 완성도와 상관없이 찾아보는 사람, 오래된 시트콤을 거의 매일 다시 보는 사람. 세 사람에게 좋아하는 콘텐츠를 묻자 작품의 이름뿐 아니라 그것을 만나고 반복해서 즐기는 방식까지 따라 나왔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만큼 어떻게 좋아하는지도 서로 달랐다.
「쓴만큼」의 첫 시리즈 「근로소비자」 7화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야기다. 매거진B 박은성 편집장, 민음사 해외문학팀 유상훈 편집자, 코요태 멤버이자 포토그래퍼인 빽가(백성현)가 시간을 쓰는 곳, 알고리즘과 취향의 관계,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을 이야기한다. 늘 무언가를 만드는 세 사람도 일을 마친 뒤에는 다음에 보고 들을 것을 찾는 소비자가 된다.
본 글은 출연자의 인터뷰와 답변서 내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박은성·유상훈·빽가가 영상과 서면으로 들려준 이야기를 읽기 좋게 다듬었으며, 영상에 담기지 않은 답변도 함께 반영했습니다.
가장 많이 소비하는 콘텐츠는 무엇인가요
시간으로 따지면 음악이에요. 이동할 때, 야근하거나 집에서 일할 때, 산책할 때, 기분을 바꾸고 싶을 때까지 거의 모든 순간에 음악을 듣죠. 음악은 수용성이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물처럼 어디서든 흐를 수 있고, 어떤 기분일 때도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게 매력이거든요. 유튜브 영상을 배경 사운드처럼 켜두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영상을 흘려보내는 방식은 잘 맞지 않아요.
청소년기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소비한 콘텐츠도 음악이었어요. 당시의 취향과 정체성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줬죠. 지금은 한 장르를 깊이 파기보다 여러 음악을 두루 듣는 편이에요. 일 때문에 많이 보는 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뉴요커의 유료 기사와 인스타그램의 여러 미디어 계정들이에요. 심정적으로 애착이 큰 건 영화예요.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한데 충분히 시간을 내서 보기는 점점 어려워졌어요.
저는 굳이 찾아서 소비하는 걸 꼽으면 공포영화예요.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부터 훌륭한 작품까지, 그 장르 자체를 좋아해서 두루 봐요. 책은 너무 일이 되어버려서 이제는 취미라고 해야 할지 구별하기 어렵고요.
어릴 때 할머니, 어머니, 누나와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영화를 같이 봤어요. 다른 장르보다 공포나 스릴러가 유독 생생하게 남더라고요. 주말 밤에 가족과 함께 보던 「엑스파일」 같은 프로그램의 기억도 겹쳐 있고요.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것과 죽음에 대한 관심도 영향을 줬던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것에 다가갈 때 느끼는 소름에 일찍 매료된 거죠.
저는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예요.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인가, 스무 살 때부터 봤는데 지금도 거의 매일 봐요. 봐도 봐도 너무 웃기고, 제 웃음 코드에 정확히 맞아요. 집에서 혼자 OTT로 좋아하는 편을 보고 또 봐요. 유튜브 오프라인 저장 목록에도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다 있어서, 비행기에서도 꺼내 볼 정도예요.
너무 좋아하니까 거기 나오신 배우분들을 한 분씩 만나보고 싶어요. 이홍렬 선배님, 신구 선배님처럼 그 작품에 나왔던 분들이요. 보는 것만으로도 그만큼 좋아요.
음악을 고를 때 알고리즘의 도움을 받나요
음악은 주로 애플뮤직으로 들어요. 거의 10년의 청취 패턴이 쌓여 있어서 다른 서비스로 완전히 옮기기가 어렵더라고요. 스포티파이도 구독하고 있지만 주로 듣는 곳은 애플뮤직이에요. 특히 라디오 채널을 좋아해요. 뮤지션이나 DJ가 호스트가 되어 자기 취향으로 음악을 틀어주는데, 그걸 듣다가 몰랐던 음악을 만나는 게 재미있어요.
유료 라디오 앱인 스택, STACK도 오래 듣고 있어요. 장르가 아니라 빠름, 중간, 느림처럼 템포로 채널을 나누는 방식이 재미있죠. 호스트의 진행 없이 음악만 흘러나오고, 템포 안에서 여러 장르를 만나게 돼요. 아예 구분 없이 음악이 흐르는 Broadcast 스테이션도 있고, 특정 인물이 자기 취향으로 선곡한 채널을 고르는 재미도 있어요.
저는 알고리즘이 제 취향을 계속 좁혀주겠다고 하는 게 썩 좋지는 않아요. 이미 좋아하는 음악과 비슷한 것만 만나기보다 예상하지 못한 곡을 의외의 순서로 듣고 싶거든요. 네가 좋아하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느낌이 좀 오만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라디오를 더 찾는 것 같아요. 어느 시기에 완전히 꽂힌 곡이 생기지 않는 한 특정 장르나 음악만 반복해서 듣지는 않아요.
저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 알고리즘을 보는 재미가 있어요. 제가 만든 음악을 재생하면 다음 곡으로 비슷한 음악이 이어지잖아요. 내 음악 뒤에 어떤 곡을 붙여주는지 보는 거죠. 새로운 곡을 알게 되기도 하고, 아는 곡이 나오면 반갑기도 해요.
새로운 콘텐츠와는 어떻게 만나나요
영화관에도 가고 OTT로도 봐요. 공포영화는 감독을 따라가며 보는 경우가 많아요. 히치콕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그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감독으로 이어지고, 가계도처럼 연결되는 게 생기거든요. 책을 읽다가 다른 작품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처럼 재미있어요. 보고 싶은 과거 작품을 여러 OTT에서 찾아도 없으면, 유튜브 요약본으로라도 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제 취향만 고집하고 싶지는 않아요. 일하면서 기획하거나 검토하는 작품 중에는 원래 제 취향이 아닌 것도 많거든요. 처음부터 선입견을 가지면 다가가기 어려워요. 우연히 마주치거나 누가 추천해준 것을 받아들였을 때 의외로 좋은 작품을 발견하기도 하죠. 콘텐츠와도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편이에요. 그러려면 늘 열린 마음으로 있어야겠죠.
저도 자연스러운 만남을 좋아하는데, 꽤 능동적으로 찾아다녀요. 나와 아무 친분도 없는 사람이 뭘 듣고 뭘 좋아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유럽 어느 도시에 사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를 팔로우하거나, 앨범만 추천하는 X 계정을 즐겨찾기 해두는 식이죠. 모르는 사람의 취향을 거쳐서 뜻밖의 것을 만나는 게 좋아요.
그래서 왓챠를 구독하고, 왓챠피디아에서도 열심히, 조용히 활동해요. 제가 본 작품에 별점을 매기고 다른 사람의 리뷰를 읽는데, 한 시간씩 보고 있을 때도 있어요. 나와 좋아하는 영화가 겹치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은 또 뭘 좋아하는지 따라가 보는 거예요. 영화를 아주 많이 본 사람이나 신랄한 평을 남긴 사람도 눈여겨봐요. 레터박스드에도 비슷한 기능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경로로 제 취향 바깥을 발견하는 게 좋아요. 알고리즘이 대신해주는 것보다 제가 직접 타고 넘어가는 게 재미있어요. 정확히 나에게 맞는 것을 추천받는 것보다, 누가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가 궁금한 것 같아요.
저한테는 재미가 가장 중요해요.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웃음 코드가 맞는 거고, 공포영화라면 「곡성」이나 「겟 아웃」처럼 분위기로 공포를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해요. 그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찾는 것 같아요.
볼 것이 많아지면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요
늘 시간이 모자란 것처럼 느껴져요. 봐야 할 것을 목록으로 만들어놓는데 계속 쌓여가니까 일종의 부채감이 생기죠. 기분 좋은 부채일 수도 있지만, 예전에 저장한 영화도 아직 못 봤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 불쾌해질 때도 있어요. 콘텐츠의 절대적인 양이 늘어난 만큼 평균적인 질은 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어요.
더 크게 느끼는 변화는 좋은 콘텐츠를 발견하는 방식이에요. 좋은 것이 있어도 알고리즘을 타지 못하거나 알리는 데 돈을 쓰지 못하면 제 눈에 들어오기 어려워요. 플랫폼 안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가만히 보면 생각보다 수동적일 수 있죠. 저는 능동적으로 발견하는 힘을 계속 기르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플랫폼에 알고리즘 추천을 끄는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직접 찾는 것만 볼 수 있게요.
저는 애타는 마음이 줄어든 것 같아요. 예전에는 방송 편성표를 찾아보고, 정해진 시간에 기다렸다가 봤잖아요. 놓치면 재방송까지 기다려야 했고요. 극장에서 내린 영화가 비디오로 나올 때까지도 시간이 걸렸죠. 해외 작품 하나를 보려고 애써 찾아다니던 기억도 있고요.
이제는 너무 많은 콘텐츠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보니, 그 만남 자체의 가치를 조금 잊게 된 것 같아요. 애타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봤을 때의 감격이 무뎌졌달까요. 언제든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잔뜩 쌓아두고 미루다가 오히려 안 보게 되는 일도 생기고요.
책과 잡지를 만드는 일에도 변화가 있나요
출판계에 들어올 때부터 불황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계속 늘어나니 더 힘들어질 거라는 이야기도 많았고요. 그런데 콘텐츠가 넘쳐나면서 오히려 고전적인 콘텐츠인 책에 다시 관심이 모이는 것 같아요.
책이 갖고 있던 재미나 지식을 전하는 역할은 유튜브 같은 곳으로 많이 옮겨갔죠. 그런데 읽기 자체는 직접적인 경험이잖아요. 민음사TV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도, 젊은 세대가 읽기 자체를 직접 경험하고 싶어 한다는 걸 느껴요. 그런 갈망이 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 같고요.
우리가 잘하던 일을 계속했더니 새로운 기회가 온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그래서 책이 다시 생명력을 얻는 걸 보면서 기쁘게 일하고 있죠.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과 잡지는 조금 달라요. 잡지는 정보와 리뷰, 이미지가 모여 있는 하나의 플랫폼이기도 하거든요. 그 역할의 일부를 인스타그램과 유튜브가 대신하게 됐어요. 사람들의 한정된 시간을 두고 경쟁한다는 느낌이 커요. 잡지는 어느 정도 시간의 여유를 전제로, 직접 가보지 못한 곳과 만나지 못한 사람을 대신 경험하게 해주는 매체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이른바 갓생을 살면서 직접 경험하려는 것들의 목록이 더 길어요. 그러다 보니 잡지의 우선순위가 밀리기도 하죠.
예전에는 종이 잡지를 알리려고 디지털 채널을 운영했다면, 지금은 그 관계가 뒤집힌 경우도 많아요. 본책을 만드는 만큼 바깥에서 할 일이 늘었죠. 전시나 팝업, 굿즈, 인스타그램 콘텐츠 같은 것들이요. 하나의 완결된 결과물보다 이미지나 장면, 협업처럼 눈에 들어오는 요소부터 소비하는 경향도 있고요.
잡지를 만드는 사람은 순서와 흐름, 맥락을 설계하는 데 익숙해요. 그런데 브랜드 매거진이니 언제나 브랜드 이야기만 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죠. 유튜브라면 그 플랫폼에 맞게 생각해야 하니까요.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노력은 그대로지만, 그 가치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지는 다르게 고민해야 한다고 느껴요.
저는 돌고 돌면 종이 잡지의 시대가 다시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잡지마다 대상이 분명했잖아요. 청소년들이 보던 잡지, 남성지, 어머니들이 보던 잡지가 나뉘어 있었고요. 그런 독자들을 찾아서 재미있는 책이 다시 많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가 있어요.
선택지가 더 많아져도 사람의 추천은 남을까요
저는 여전히 사람이 골라주는 것과 공신력 있는 미디어의 힘을 믿어요. 알고리즘이나 대중의 평균치에 맞춘 추천에는 좀처럼 애착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나와 비슷한 사람의 취향도 궁금하고, 전혀 다른 사람의 취향도 궁금해요. 예측할 수 없는 선택에서 오는 자극을 원하니까요.
예전에는 팬덤이라고 하면 아이돌을 좋아하는 청소년이나 카리스마 있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모인 큰 집단을 떠올렸잖아요. 요즘은 훨씬 작고 다양한 단위의 팬덤이 생긴다고 느껴요. 모두가 아는 거대한 스타만이 아니라 물건을 소개하는 사람이나 작은 분야의 인물에게도 팬이 생기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죠. 기술이 정교해져도 결국 사람은 사람을 궁금해하는 것 같아요.
우리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연대와 연결, 공감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닐까 싶어요. 누구나 아는 큰 스타에서 나만 알고 싶은 사람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거죠. 팬덤의 대상도 사람을 넘어 브랜드와 캐릭터, 물건까지 넓어지고요. 그래서 누군가의 삶과 취향이 콘텐츠가 되고, 그 사람의 추천이 쇼핑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더 강해질 것 같아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콘텐츠에 대한 사랑이요. 저도 회사에서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돈이나 흥행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돈이 될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만들면 뜻대로 잘 안되더라고요. 꼭 대중의 선택을 받는 것도 아니고요.
결국 제가 사랑하는 것을 해야 더 잘 이야기할 수 있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어요. 먹고살기 위해 흥행을 추구하더라도, 밑바탕에는 콘텐츠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호기심과 개방성이에요. 이런 일을 하려면 무엇이 중요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단한 기술을 기대하시는 것 같은데, 늘 같은 답을 하게 돼요.
잡지를 만드는 일은 원래 관심이 없던 분야도 배우고 소화해야 하거든요. 점과 점을 연결할 만큼 여러 방면에 호기심을 갖고 있어야 해요. 특정 분야의 애호가로만 남아서 나는 이것만 좋다고 선을 그으면 어렵죠. 먼저 받아들여보고,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자기만의 시선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상업적인 작업이라면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겠죠. 그걸 떠나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자기 색이에요. 윤상의 음악을 들으면 윤상 같고, 이현도의 음악을 들으면 이현도 같잖아요. 영상에서도 특정 감독의 느낌이 딱 드는 것들이 있고요. 콘텐츠가 아무리 많아도 자기만의 색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좋은 콘텐츠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다양하게 해석되고, 각자에게 다른 울림으로 남는 콘텐츠예요. 그건 콘텐츠의 생명력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흘러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면, 오래 살아남으면서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겠죠.
자기 색깔이 짙으면서도 타인과 타협할 수 있는 정도를 갖춘 콘텐츠요. 자기 색이 분명한 것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플랫폼과 콘텐츠의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기준을 하나로 정하기는 어렵지만, 공통적인 가치를 고르면 오리지널리티예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무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누구나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의 영향을 받잖아요.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다시 조합했을 때, 결과물 어딘가에 만든 사람의 인장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너무 매끄럽고 완벽한 것보다 조금 모자라거나 어떤 부분은 넘치는 콘텐츠에 마음이 갈 때도 있어요. 그 요철에서 만든 사람의 개성이 보이거든요. 부족한 부분을 제 상상으로 채워보고 싶거나, 이 사람에게 어떤 배경이 있기에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작품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오래 남은 영화 한 편을 고른다면요
저는 「올드보이」예요. 이야기와 음악, 미장센이 모두 완벽하다고 느껴요. 방의 패턴이나 보라색처럼 화면 안에서 무언가를 암시하는 요소들도 좋고, 무엇보다 음악이 정말 좋아요. 제가 오케스트라 앨범을 만들 때도 그 음악에서 큰 영감을 받았어요.
저는 한 편을 고르기가 너무 어려워요. 좋아하는 영화가 계속 바뀌기도 하고요. 그래도 공통점을 찾자면 삶의 아이러니를 다루는 영화를 좋아해요. 원하는 것과 얻게 되는 것이 어긋나는 이야기에서 희열을 느끼는데, 결국 그게 인생 같아서요.
「블루 재스민」, 「킬러들의 도시」, 「라라랜드」가 그런 영화예요. 특히 마틴 맥도나 감독의 「킬러들의 도시」는 반복해서 볼 정도로 좋아해요. 「펀치 드렁크 러브」나 「복수는 나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떠오르고요. 하나만 고르라는데 계속 늘어나네요.
저는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을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열 번쯤 본 것 같아요. 린치의 작품 세계가 응축되어 있고, 이야기와 영상, 음악, 연기에서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게 없다고 느껴요. 천의무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품이죠. 제게는 다른 영화를 볼 때도 모범이 되는 작품이에요. 린치 감독이 영화를 더 남겨주셨으면 했는데, 작품 수가 많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셔서 가슴이 아파요.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처럼 묘하고 낯선 분위기의 영화도 좋아하는데, 제게는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그 정점에 있어요.
드라마와 시리즈 중에서도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반복해서 봐도 재미있는 건 「섹스 앤 더 시티」예요. 제게는 성인으로 들어가는 관문 같은 작품이었어요. 뉴욕에 대한 동경도 있었고, 네 캐릭터가 서로 다르게 움직이면서 맞물리는 방식과 대사가 정말 재미있죠. 시리즈 전체를 여러 번 봤어요.
OTT 시대가 되니 오히려 시리즈에 집중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 같아요.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미뤄두니까요. 그래도 「소년의 시간」은 구독료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좋았어요. 인물을 계속 따라가는 촬영 방식도 인상적이고 이야기의 흡입력이 강해서 앉은 자리에서 다 봤죠. 또 하나는 「셀링 선셋」이에요. 로스앤젤레스 부촌의 부동산을 판매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보는데, 남에게 말하기는 조금 쑥스럽지만 너무 재미있어요. 대단한 교훈이 없어도 다음 시즌을 기다리게 되는 제 길티 플레저예요.
저는 HBO의 「석세션」이요. 너무 좋아하면 울고 싶어지는 느낌이 있잖아요. 그 정도로 좋아해요. 재벌가의 경영권 승계를 다루는데, 우스꽝스러우면서 비극적이고 등장인물들이 모두 미운데 또 연민이 가요. 조롱하고 싶다가도 결국 다 보고 나면 모두에게 마음이 가는 거예요. 앞으로 한 드라마만 반복해서 봐야 한다면 저는 이 작품을 고를 것 같아요. 사운드트랙까지 정말 좋아하고요.
드라마를 제외한 OTT 시리즈를 고르면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요. 제게는 이보다 더 잘 만든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좋은 작품이에요. 조던 한 사람의 영웅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아요. 스코티 피펜, 데니스 로드먼, 필 잭슨 감독의 이야기가 겹치면서 하나의 팀이 만들어지고 정점에 올랐다가 해체되는 과정까지 보여주거든요. 위대한 개인만큼 그를 둘러싼 팀의 이야기가 있어서 더 값지게 느껴져요.
서로에게 콘텐츠 하나씩 추천한다면요
편집장님께는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 채널을 추천하고 싶어요. 제가 클래식에서 특히 좋아하는 음악가가 바흐거든요. 소극장에서 인디 밴드가 연주하는 것처럼 아늑한 분위기로 들려주는 느낌이 좋아요. 클래식에 관심이 있으시면 즐겁게 감상하실 것 같아요.
음악을 하시니까 「마크 론슨과 들여다보는 사운드의 세계」를 재미있게 보실 것 같아요. 애플TV의 다큐멘터리인데, 리버브나 오토튠, 신시사이저, 샘플링처럼 음악에서 익숙하게 듣는 소리와 기술을 하나씩 탐구해요. 선구적인 뮤지션을 만나고 실제 소리도 들려주죠.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소리를 다큐멘터리 자체의 사운드와 편집에도 연결해요. 설명과 형식이 맞물리는 재미가 커요. 실수나 결함처럼 보였던 것을 누군가는 다르게 듣고 끝까지 밀어붙여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좋고요.
상훈 님께는 요미야미를 추천해요.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정말 진심이신 것 같더라고요. 이 채널도 음식에 굉장히 진지해요. 일단 한 편만 보시면 마음에 드실 것 같아요.
영상에서 다 못한 이야기
박은성·유상훈·빽가의 사전 답변에는 영상에서 충분히 펼치지 못한 생각과 작품들이 더 있다. 매체와 일의 변화부터 책,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유튜브 채널까지, 세 사람의 선택을 이어 읽는다.
책을 고르는 취향도 나이에 따라 달라지나요
예전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꼽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변하더라고요. 산을 오르며 높이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는 것처럼, 예전에 좋아했던 것이 낯설어지고 지나쳤던 것이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편집하면서 그걸 새삼 느꼈어요. 「등대로」를 통해 울프의 위대함은 알고 있었는데, 원서를 읽고 작품을 거듭 들여다보니 이 작품이 왜 걸작인지 다시 알게 됐어요. 하루 동안 파티를 준비하는 이야기 안에서 여러 사람의 의식과 역사적 상처, 인간의 상실감이 펼쳐지죠.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저는 성경을 거대한 이야기의 원전으로 생각해요. 영화나 소설을 보다 보면 성경에서 출발한 인물과 상징, 이야기 구조를 계속 만나게 되거든요. 알고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고, 그만큼 콘텐츠를 보는 재미가 커져요. 오랫동안 변주되고 다시 쓰여온 이야기라는 점에서 흥미로워요.
기발한 아이디어와 흥미로운 비주얼로 채워진 잡지와 아트북을 보는 즐거움도 남아 있어요. 한 장씩 넘길 때의 설렘이 예전만큼 크지는 않더라도요. 「Marfa」와 「L’Etiquette」 같은 잡지를 챙겨보는데, 화면에서 느끼기 어려운 순서와 판형, 종이의 질감까지 누군가 설계한 흐름을 따라가는 경험이 여전히 좋아요.
저는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이요. 잠언처럼 삶의 지침을 간결하지만 강하게 전해주는 점이 좋아요.
애니메이션과 게임에서도 인생 콘텐츠를 고른다면요
1990년대를 대표하고 각자의 장르를 바꾼 두 작품,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소녀혁명 우테나」를 꼽고 싶어요. 「에반게리온」은 첨단 메카닉과 소년의 성장 이야기라는 겉모습을 한 컬트적인 작품이죠. 「우테나」는 소녀 전사물의 겉모습 안에서 기존 소녀 로맨스와 학원물의 문법을 뒤집고요. 제게는 그 작품들을 전후로 장르가 달라졌다고 느껴지는 분수령이에요.
게임에서는 「엘든링」이요. 민음사TV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역대 최고의 게임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는 건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만화와 게임에는 인연이 닿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PC방이나 만화방에 갈 때 저는 음악을 찾아 듣거나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과 채팅을 했죠. 만화방에 따라가도 패션 잡지를 봤고요. 「슬램덩크」 세대인데 아직 그것도 못 봤어요.
좋게 생각하면 은퇴 후 새롭게 알아갈 장르를 하나 온전히 남겨놓은 셈이에요. 그때 명작 만화들을 하나씩 읽어보고 싶어요. 그래도 게임 하나를 고르라면 테트리스가 최고예요.
저는 「은비까비의 옛날 옛적에」예요. 어린 시절의 제게 많은 교훈을 준 애니메이션이에요.
한 편만 고르기 어려웠던 영화와 드라마도 더 들려주세요
순수하게 오락적인 재미를 주는 영화로는 「엑스맨」 시리즈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좋아해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는 제가 가장 많이 본 영화 중 하나일 거예요. 「사랑의 블랙홀」도 비슷한 이유로 좋아하고요. 한 인물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괴로우면서도 깊이 이입하게 했던 영화는 「팬텀 스레드」와 「그을린 사랑」이고, 「시카리오」는 연출에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드라마를 생각해보면 저는 HBO를 정말 사랑하더라고요. 「석세션」 다음으로는 「체르노빌」과 「빅 리틀 라이즈」가 떠올라요. HBO 작품이 아니어도 「성난 사람들」 시즌 1과 「완다비전」을 좋아해요. 어릴 때 본 드라마 중에서는 「서울의 달」이 기억에 남고요.
돌이켜보니 미국 드라마를 많이 좋아했네요. 심야 방송을 기다리게 했던 「엑스파일」, 린치의 「트윈 픽스」도 빼놓을 수 없어요. 그래도 에피소드가 거의 외워질 정도로 본 건 「섹스 앤 더 시티」예요. 캐리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미워질 때도 있는데, 어쩌면 제 모습이 보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드라마는 따로 보지 않아요. 좋아하는 시리즈물을 고르라면 역시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요.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기억에 남은 뮤직비디오는 무엇인가요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마이클 잭슨과 자넷 잭슨의 「Scream」이에요.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는 거의 모든 작품이 기억에 남아 있죠. 성인이 된 뒤 본 작품 중에서는 켄드릭 라마의 「Humble」, 차일디시 감비노의 「This Is America」, 자미로콰이의 「Virtual Insanity」도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다만 요즘 더 자주 보는 건 MTV Unplugged 영상이에요. 너바나, 조지 마이클, 로린 힐, 머라이어 캐리의 공연 같은 것들이요.
미셸 공드리가 감독한 카일리 미노그의 「Come Into My World」예요. 단순한 주제를 반복하면서 얼마나 풍부한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지금도 감탄하게 돼요.
케미컬 브라더스의 「Do It Again」이요. 영상미와 이야기, 음악까지 모두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자주 찾아보는 유튜브 채널은 무엇인가요
레드불 BC One의 댄스 경연,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볼 수 있는 tvN SPORTS, NPR Music의 「Tiny Desk Concert」예요. 주로 음악과 스포츠, 춤을 찾아보죠. 유튜브에 출연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머쓱하지만, 토크 프로그램은 오래 보면 금방 피로해져서 잘 못 보는 편이에요. 라디오도 출연자의 사담보다 음악을 계속 들려주는 쪽이 좋고요. 그래도 「쓴만큼」은 열심히 볼 거예요.
민음사TV 말고는 고정적으로 챙기는 채널이 많지 않아요. 그래도 「그것이 알고 싶다」, 「심야괴담회」, 「이호선 상담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봐요.
Boiler Room과 Mixmag, Openhouse Seoul이요. 앞의 두 채널은 집에서 음악을 틀어놓을 때 보고, Openhouse Seoul은 언젠가 제 집을 지을 생각이 있어서 봐요.
플랫폼과 AI의 변화는 사진을 만드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오나요
제가 플랫폼에 푹 빠져 사는 편은 아니라 변화를 다 안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다만 사람을 만날 때 인간적인 느낌이 줄어든다는 생각은 들어요.
매체마다 다르게 느끼기도 해요. 책은 모니터나 휴대전화보다 종이책으로 읽는 게 좋고, 잡지는 온라인으로 봐도 괜찮아요. 사진도 꼭 인화된 사진이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다고 느껴요. AI 때문에 촬영이 줄어드는 한편 촬영 이후의 후반 작업은 편해졌고요. 이런 변화에 따라가기 위해 AI를 공부하고 있어요. 앞으로 더 강해질 요소를 고르라면 역시 AI라고 생각해요.
콘텐츠가 넘칠수록 나만의 것을 찾기는 어려워질까요
알고리즘의 영향을 피하기 어려운 시대인 건 맞아요. 그래도 산업화가 오히려 환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듯, 콘텐츠가 넘치는 일이 자기만의 콘텐츠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길러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나일강이 범람한 뒤 땅이 비옥해지는 것처럼요.
선택지가 넓어져도 각자의 고유한 알고리즘이 있으니, 결국 비슷한 곳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사진과 음악에 관련된 콘텐츠는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좋은 콘텐츠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이런 유튜브에 출연하는 것도 제 나름의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미디어의 권위를 지키는 것만큼, 여러 채널에서 브랜드를 알리고 더 많은 사람의 시선과 호감을 얻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죠. 의외의 대상들과 다양한 일을 해보는 것도 중요하고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반응을 얻을지는 모르니까요.
이벤트를 하더라도 인간적인 호감이 먼저 생겨야 애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물론 좋은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데 들이는 노력은 변함없어요. 다만 잘 만들었으니 알아봐주겠지 하고 기다리기보다, 그 안의 가치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장치로 바꾸는 일까지 콘텐츠 제작의 일부로 받아들여야겠죠.
내가 만들고 싶은 것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조율하나요
저는 제가 보고 싶은 것이 보는 사람도 보고 싶은 것이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요. 저도 독자이자 소비자니까,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는 거죠. 제가 이것을 보고 싶다는 확신이 있어야 결과물에 구체적인 관점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다만 무엇을 만들지에 대해서는 저를 믿어도, 그것을 어떻게 알릴지에 대해서는 예전만큼 순수성을 고집하지 않아요. 먼저 가닿아야 소비될 기회가 생기니까요. 세상에 내놓은 다음에는 밈이 되든 인테리어 소품이 되든, 어떻게 소비될지까지 제가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려고 해요.
취향의 출발점에는 가족과 함께한 밤이 있고, 매일 다시 보는 웃음이 있고, 처음 듣는 음악이 있다. 좋아하는 작품을 설명하는 동안 세 사람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도 드러냈다. 한 편을 고르기 어려울 만큼 좋아하는 마음은 마침내 서로에게 건네는 추천으로 이어졌다. 은성에게는 바흐의 연주를, 빽가에게는 소리를 탐구하는 다큐멘터리를, 상훈에게는 음식에 진지한 채널을. 다음 콘텐츠를 고르는 기준에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의 취향이 하나씩 더해졌다.
편집 안내
이 글은 「근로소비자」 7화의 영상 대화에 박은성·유상훈·빽가의 사전 답변을 더한 확장 인터뷰입니다. 본문 답변을 보강하고, 영상에 담기지 않은 별도 사례와 질문은 ‘영상에서 다 못한 이야기’에 모았습니다. 문장은 읽기 좋게 다듬었으며 실제 발언을 그대로 옮긴 속기록은 아닙니다.
채널 소개
「쓴만큼」은 돈과 시간을 쓴 만큼 그 사람이 보인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채널입니다. 첫 시리즈 「근로소비자」는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 사람들의 소비와 삶을 이야기합니다.